경주문중 소개
입향조 출생 |
* 일형(日馨)입향조께서는 파시조의 14세 손으로서 영조(英祖) 계해(癸亥:1743) 8월 13일에 출생
* 공의 부친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하중(夏重)의 장남이시다.
* 공의 모친은 증숙부인(贈淑夫人)으로 경주박씨(慶州朴氏) 후영(厚永)의 따님이시다.
입향조 일대기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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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
숙종15년 |
o 숙종15년 기사년에 입향조이신 일형의 고조부이신 치신(治藎)께서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봉직하던 중, 주상께서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 폐출하고, 장희빈(張嬉嬪)을 맞아들이는 것에 통분하시어 관직을 버리시고 상봉하솔(上奉下率)하셔서 경상도 안동(安東)의 춘양리 현동(縣洞)산골에 은둔 |
파시조 10세 치신선조 낙향 |
1692년 |
숙종18년 |
o 삼년 후인 임신년(壬申年:1692)에 영천(永川)의 금호리(琴湖里) 종동(宗洞)으로 다시 이거하셨음. |
치신/근길 영천 在墓 |
1743년 |
영조19년 |
o 입향조이신 일형께서 영조19년 계해년 8월 13일 출생 o 휘(이름)는 일형(日馨)이고, 자는 내은(乃殷)이며 호는 우옹(愚翁)이시다. |
영천 금호 중동에서 출생 |
1756년 |
영조32년 |
o영조(英祖) 32년 병자년(丙子年:1756)에 조고(祖考)이신 휘 경필(慶弼), 통덕랑(通德郞) 후릉참봉께서 배친(陪親)하여 경주시 월남리(月南里)로 이거 |
경필 선조 경주 在墓 |
1762년 |
영조38년 |
o 영조 38년 임오년(1762)에 일형께서 사도세자 비극을 통탄하여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고사하였음. |
입향조 20세 |
1779년 |
정조3년 |
o 정조(正祖) 3년 기해(1779)에 경주부 동쪽 와읍(臥邑) 능곡동(陵谷洞)에 천거(遷居)하셨으니 경주지역 후손 세거지지(世居之地)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셨다 |
입향조 37세 |
낙향 후의 삶의 근본 |
5대 잠언 |
1. 어리석음으로서 나를 지키라(愚 箴) -“鑑誡前轍(감계전철) 我守以愚(아수이우)”. -“지나간 자취를 거울삼아 경계하여, 어리석음으로서 나를 지키라." |
愚 箴 (우 잠언) |
2. 자기의 분수대로 살아라(安分 箴) -“昊天禀人(호천품인) 各有其分(각유기분)”이니, “興居自適(흥거자적) 悟歌墳典(오가분전)”이라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줄 때 각자 분수가 있으니, 분수대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을 깨우쳐 노래하게 되리로다.” |
安分 箴 (안분 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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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주의 질서대로 살아라(敬天 箴) -“不厚其大(불후기대) 不薄其小(불박기소)” -“하늘이 내려준 것을 크다 하여 후하게 여기지 말고, 작다 하여 박하게 여기지 말고 우주 질서를 따르라.” |
敬天 箴 (경천 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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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옛사람을 본받아 수신제가하라(修齊 箴) -“不有修齊(불유수제) 治平詎論(치평거론)”, “日夕乾乾(일석건건) 對越古人(대월고인)” -“수신제가하지 않고 어찌 치국평천하를 논하리. 조석으로 쉬지 않고 노력하여, 지극정성으로 옛사람을 본받으라.” |
修齊 箴 (수신 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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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야 한다.(知止 箴) -“禍患機穽(화환기정) 皆由不止(개유불지)”, “止我所止(지아소지) 寡過是止(과과시지)” -“재앙과 함정은 모두 머무르지 아니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르고, 지나침을 적게 하는 것, 이것이 머무르는 것이니라.” |
知止 箴 (지지 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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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강령 |
▶ 우옹공은 대의명분과 강상(綱常)을 따르는 것이 ‘바보 같은 짓’으로 치부되는 영정조시대에, 비록 세상이 지혜와 교묘함을 다툴수록, 오히려 우(愚)와 졸(拙)이 자신들의 절조(節操)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버슬을 버리고 낙향하셨다. ▶ 우옹공은 이웃과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선조(先祖)를 받듦에 있어 어리석어서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고,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 어리석어 힘을 다하지 못하셨으며, 벗을 사귐에 있어 어리석어 먼저 베풀지 못했다.”고하여, 우옹(愚翁)이라 자호(自號:스스로 지은 호)한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셨다. |
대의명분과 仁義禮智信을 지키기위해 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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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70세) |
순조12년 |
o 순조(純祖) 12년 임신(壬申) 정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 이셨다. |
잘난채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음으로서 난세에 삶의 지표로 삼으셨다. |
입향조 가정사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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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
영조22년 |
o 입향조부인인 밀양박씨는 영찬(永纘)의 따님으로서 영조(英祖) 병인년(丙寅年:1746) 9월 2일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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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
헌종12년 |
o 밀양박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으며, 헌종(憲宗) 12년 정유(丁酉) 1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92세의 수를 누리셨다. o 묘는 경주오류리지경의 태제암산(太第巖山)곤좌(坤坐) o 입향조 우옹공과 정부인 밀양박씨 사이에 3남을 생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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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
영조45년 |
o 장남은 휘철(輝喆)이시며, 1769년 영조45년 3월 14일에 출생, 숭정대부 호조판서추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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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
영조49년 |
o 2남은 휘노(輝魯)이시며, 1773년 영조 49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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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
정조1년 |
o 3남은 휘례(輝禮)이시며, 1777년 영조 53년 출생 |
입향조 사후 추모사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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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
고종3년 |
o 공의 장손 정돈(貞敦)이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로 제수됨에 따라 그 은혜로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曺參議)를 받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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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고종5년 |
o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同知 義禁府事)에 추증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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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993년 |
12월 10월 |
o 경주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경주문중)이 진남군의 학덕을 숭상하고 추모하기 위해 경주시 양북면 와읍리 陵谷마을에 우천서당과 상덕사(진남군의 제3 재실)를 건립하였음. |
우천서당건립 상덕사건립 |
매년 |
3월초해일 |
o 경주 향유(鄕儒)에서 경주문중과 협의하여 진남군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장헌세자의 변으로 경주에 은거하신 14세손 우옹공(愚翁公)을 배향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 亥日에 향례(享禮)를 봉행(奉行)하고 있음. |
매년 정기 향례 |
경주문중의 연혁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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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
연중 |
o 1929년 기사보 편찬 때, 副有事로 경주후손 완순(完淳: 경주군 양북면 와읍리)선조가 참석함으로써 경주문중이 형성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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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우천 서당
1975년 |
2.02
건 립
준 공 |
o 우천서당건립을 추진하면서 공식적으로 전주이씨 진남군파 경주문중을 구성, 정기총회를 통해 건립 승인 -초대 회장에 중희(重熙), 총무유사에 상희 선임 o 1965.06~1972.12 : 건립 기금 모금 및 자재 확보 o 1972.03~12월 : 우천서당 설계, 건축도면 확정, o 1973.05.25. : 우천서당 기초공사 실시 o 1975.12월 : 우천서당 준공 |
경주문중 자체모금 활동으로 우천서당 건립 |
1990년
상덕사
1993년 |
2.24
건 립
준 공 |
o 1990.02.24. : 전주이씨 진남군파 경주문중 정기총회를 통해 건립 승인 o 1992~1992년 : 목재 확보 및 자재 획득, 도면설계, o 1992.03.22. : 상덕사 토목기초공사 실시 o 1993.10.26. : 상덕사 준공 |
개인별 목재 기부 |
1986년 |
2월2일 |
o 규약 제정, 1986년(병인) 음력 2월 2일, 1차 개정(1990년), 2차 개정(1997년) * 매년 음력 2월 1일에 신년 총회개최, * 매년 음력 8월 16일에 추석 총회 개최 정례화, * 회의장소는 우천서당 |
집성촌 거주후손 중심으로 회의운영 |
2010년 |
6.12 |
o 제1회 조상방문의 날 행사 개최, 450명 참석 * 파종회의 총무이사 참석 * 경주문중의 사위 정수성국회의원 당선 축하 |
출향한 후손참여 시작 |
2011년 |
3.20일 4.23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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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입향조께서 남기신 2권의 시문집(우옹문집)을 발간 o 제2회 조상방문의 날 행사 개최, 350명 참석(), * 파종회의 총무이사 참석, 집성촌복원 발의 * 집성촌 복원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 위원장(재준) -사무국장(재천), 위원(재병,재원,완희,재찬) |
입향조유업 계승위해 집성촌 복원발의 |
2012년 |
3.15
4.21
12.23 |
* 농림부에 집성촌복원사업 신청 : 위원장(명규) -사무국장(재천), 위원(재원,재찬,재틱,종대,임충권) o 제3회 조상방문의 날 행사 개최, 250명 참석 * 파종회의 회장님과 전례이사 참석 * 농림축산식품부에 집성촌복원사업 당선, 승인 |
조합임원 구성운영
정부승인 |
2013년 |
2.12 4.27
12.26 |
o 집성촌 복원사업 정비구역 지정 신청(경북도청) o 제4회 조상방문의 날 행사 개최, * 280명 참석(파종회의 회장 참석) * 경북도청 마을정비구역지정 승인 |
도지사 승인 (18억원) |
2014년 |
3월 4월 |
o 집성촌 복원사업 실시설계 수립(경주시청) o 조상방문의 날 행사를 마을복원공사로 일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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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
2.24 4월 10월 |
o 집성촌 복원사업 실시설계 고시(경주시청) o 집성촌 복원사업 마을 기반공사 착공 o 집성촌 전기통신지중화사업 승인 |
경주시장 승인 |
2016년 |
6월 9월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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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집성촌 전기통신지중화사업 발주, 착공 o 집성촌 복원사업 마을 기반공사 준공 * 도로확장, 상하수공사 현대화, 연못/당재나무 공원화 o 36세대별 주택 신축 및 리모델링 * 주택신축자 : 명규,재천,재찬,재기,현종,관종,청자,권태진, 재석,종윤,종철,종호,종완,명애,재옥,박종표,박종수 * 입향조, 동암종택건립, 총20 세대 신축예정 |
농어촌공사 경주지사 시행기관 |
▶ 위의 자료는 선원속보(족보)와 경주문중에서 발간한 우옹문집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수집 및 정리 하였음
▶ 자료수집 및 정리 : 재천(在千)
우옹(愚翁) 이일형(李日馨)의 삶과 사상(思想) |
1. 부군(府君)의 가계(家系)
부군의 휘는 일형(日馨 : 1743년 ~ 1812년), 초휘는 일신(日新), 자는 내은(乃殷), 호는 우옹(愚翁)이며, 조선왕조 2대 정종대왕의 여섯째 왕자 진남군(鎭南君)의 14세손이시다.
파시조인 진남군으로부터 우옹의 직계조상과 직계비속의 가계를 그려보면 <표 1>과 같다.
<표 1>우옹의 직계조상과 손
①진남군(終生)→②3남 봉성군(夷)→③부안정(增)→④익흥수(孝源)→⑤현충(顯忠)→ ⑥언무(彦茂)→⑦정상(禎祥)→⑧종간(宗侃)→⑨정(靖)→⑩치신(治藎)→⑪근길(根吉)→⑫경필(慶弼)→⑬하중(夏重)→⑭일형(日馨)→⑮휘철(輝喆),휘로(輝魯),휘례(輝禮) |
2. 부군의 낙향연혁 및 약력
부군의 조상은 대대로 조정에 봉직하시다가 고조고이신 휘 치신(治藎)께서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봉직하던 중, 숙종 15년 기사(1689)년에 주상께서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맞아들이는 것에 통분하시어 관직을 버리시고 상봉하솔하셔서 안동의 춘양리 현동 산골에 은둔한 후, 경북영천을 거쳐서 영조 32년 병자(1756)년에 조고이신 휘 경필(慶弼)께서 경주시 월남리로 이거하셨다.
영조 38년 임오(1762)년에 부군께서 사도세자의 비극을 통탄하여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고사하시고, 정조 3년 기해(1779)년에 경주부 동쪽 와읍 능곡동에 천거하셨으니, 후손들 세거지지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셨다.
부군께서는 영조 19년 계해(1743)년 8월 13일에 출생하셔서, 순조 임신(1812)년 1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칠십이셨다.
부군께서 낙향하신지 어언 삼백여 년이며, 와읍 능곡동에 입향하신지도 이백오십여 년이 되었다. 부군께서 입향하셔서 손수 심으신 유목(楡木:느티나무)이 아직도 건재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대되어 마을에서는 매년 동신제(洞神祭)를 봉향하고 있으며, 부군의 후손이 무릇 수천여 명이다.
3. 부군의 시문집(詩文集) 편찬
부군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으며, 총명하고 영리함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이었으며 자라면서 문장과 학문이 풍부하고 넉넉하였으며 필력이 강건하였다.
특히 시문에 더욱 뛰어나 지은 문장이 적지 않았으나 그때그때 버리고 자제들이 수습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습하여 보관해오다가 황송하게도 화마로 일부 소진되고 남은 것을 편술하고 국역하여 2011년 ⟨표 2⟩와 같이 8개의 장르로 구성된 국역본 “우옹문집”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부군께서 많이 쓰신 것이 한시(漢詩)인데, 한시는 대부분 7언율시(七言律詩)로 구성하셨다. 7언율시(七言律詩)란 1구에 7자씩 총 8구 56자로 이루어진 시형(詩形)으로서, 2개 구를 한 개의 연(聯)으로 하여 한시의 전형적 구성법(構成法)인 4단법에 의거 구성하셨다.
<표 2> 우옹문집(8개 장르)
① 시(詩) : 80편의 시, ② 만(輓) : 애도 시 10편, ③ 서(書) : 19편의 편지, ④ 잠(箴) : 잠언 5편, ⑤ 서(序) : 머리말 2편, ⑥ 기(記) : 기행문 6편, ⑦ 전(傳) : 전시글 1편, ⑧ 설(說) : 논설 3편 |
① 기구(起句:두연)에서는 정경(情景)을 묘사하여 시상(詩想)을 일으키고, ② 승구(承句:함연)에서는 시상을 이어받아 전개시키며, ③ 전구(轉句:경연)에서는 시상을 변화시켜 전환시킨 후, ④ 결구(結句:결연)에서 전체의 시상을 하나의 주제(主題)로 묶는 방법으로 작시하셨는데, 기구와 승구에서는 대개 정경(情景)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셨으며, 전구와 결구에서는 대개 정서(情緖)를 주관적으로 서 하셨다
4. 시문학을 통해서 본 부군의 삶
가. 청빈한 삶의 모습을 읊다.
부군께서는 영조의 사도세자 변을 통탄하시고 낙향하여 살 곳을 정하시면서 시를 읊은 섰는데, <표 3>과 같은 한시에서 시류를 쫓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부군(우옹)의 청빈한 인생관을 엿 볼 수 있다.
<표 3> 살 곳을 정하다(卜居)
人淳俗朴太初隣 水色山光別有春 半世城塵潦倒跡 相親魚鳥等閒身 數椽茅屋窮山裡 一巷桑麻隔海濱 堪笑人寰名利客 黃昏迷路趁淸晨 |
“사람과 풍속이 순박하니 태초 때의 이웃이요, 산수의 물색(物色)으론 별세계의 봄이로다. (人淳俗朴太初隣 水色山光別有春)
반평생을 도읍의 띠 끌 속에서 쇠락하게 지내와, 고기나 새와 친하게 지내는 한가로운 몸이로다. (半世城塵潦倒跡 相親魚鳥等閒身)
두어 칸 초가집이 산골짜기 속에 있고, 한 마을이 온통 누에치고 길쌈하는 먼 바닷가로다. (數椽茅屋窮山裡 一巷桑麻隔海濱)
더없이 우습도다. 인간 세상에서 명리 좇는 나그네여, 황혼에 길을 잃고 맑은 새벽을 향해 달리는 도다.” (堪笑人寰名利客 黃昏迷路趁淸晨)
나. 어리석음으로서 세상을 살다.
부군께서는 <표 4>와 같은 <우잠(愚箴)>이라는 한시를 통해, 어지러운 영조 정조 시대에 ‘어리석음’을 인생의 기둥으로 삼아 살아 갈 것임을 다짐하시면서, 스스로 아호(我號)를 “우옹(愚翁)”이라 지으셨다.
“옛날의 철인(哲人)은 종일토록 어리석은 체 하였다. 모여 있을 땐 듣지 못하는 듯하고, 듣는다고 해도 어리석음으로써 하였다.
(在昔哲人,終日如愚。裒如不聞,聽以用愚)
멍한 듯이 말하지 아니하고, 말한다고 해도 어리석음으로써 하였다. 대지가 어둡고 아득하니 본시 타고난 것이 어리석음이라.
(嗒然不言,言以用愚。大塊冥邈,素賦是愚)
<표 4> <우잠(愚箴)>
在昔哲人,終日如愚。裒如不聞,聽以用愚。 嗒然不言,言以用愚。大塊冥邈,素賦是愚。 范滂不愚,毁謗黨錮。陸恂笑愚,竟至竄幽。 鑑誡前轍,我守以愚。 |
범방(范滂)은 어리석지 못해, 남을 헐뜯고 비방한다고 당고(黨錮)에 화를 입었고, 육순(陸恂)은 어리석음을 비웃다가, 마침내 귀양 가는 처지가 되었다.
(范滂不愚,毁謗黨錮。陸恂笑愚,竟至竄幽)
앞에 지나간 자취를 거울삼아 경계(箴)함으로써, 어리석음(愚)으로서 나(我)를 지키리라.” (鑑誡前轍,我守以愚)
다. 늘 충절과 의리를 숭상하시다.
또한 부군께서는 종묘(宗廟)의 제관(祭官)으로 선임되어 정 4품인 사예(司藝)의 직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늘 충절(忠節)과 의리(義理)를 숭상하여 그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사육신 관련 유문일사(遺聞逸事)를 엮어, “병자사화보유기(丙子士禍補遺記)”로 찬술하기도 하셨다.
이 글에서 부군께서는 충절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육신(六臣:단종복위를 거사한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대한 당대와 후대의 평가에 더하여 부군의 사상을 기록함으로써 “옳은 일을 바르게 하라”는 충심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중요시 하셨다.
라. 후손들에게 5개의 잠언을 남기시다.
부군께서는 후손들에게 경계하고 조심해야할 5가지의 잠언, ① 어리석음에 대한 잠언(愚 箴), ② 안분(安分)에 대한 잠언(安分 箴), ③ 하늘을 공경함에 대한 잠언(敬天 箴), ④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대한 잠언(修齊 箴), ⑤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야 한다는 잠언(知止 箴)을 글로 남기셨다.
이 중에 우잠은 <표 4>와 같으며, 특히 오늘날 우리세대의 후손들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귀감이 되는 것으로서 <知止 箴>은 <표 5>와 같다.
<표 5> <지지 잠(知止 箴)>
有鳥邱隅,孔曰知止。可謂人兮,不知其止。 爲君君止,爲臣臣止。爲父父止,爲子子止。 居貧思富,不知其止。賤而挾貴,不知其止。 禍患機穽,皆由不止。止我所止,寡過是。 |
“새가 언덕 모퉁이에 있는 것에 대해, 공자는 머무를 곳을 안다고 말하였으니, 사람으로서 그 머무를 곳을, 모른다 할 수 있으랴.
(有鳥邱隅,孔曰知止。可謂人兮,不知其止)
임금이 되면 임금의 위치에 머무르고, 신하가 되면 신하의 위치에 머무르며, 아비가 되면 아비의 위치에 머무르고, 자식이 되면 자식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爲君君止,爲臣臣止。爲父父止,爲子子止)
가난하게 살면서 부유함을 생각하는 것은,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천하면서도 귀한 것을 의식하는 것은,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居貧思富,不知其止。賤而挾貴,不知其止)
재앙과 근심은, 모두 머무르지 아니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내가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르고, 지나침을 적게 하는 것, 이것이 머무르는 것이니라.”
(禍患機穽,皆由不止。止我所止,寡過是止)
5. 결언
“군자는 덕이 성대(盛大)하지만 그 모습은 어리석은 것 같다.” 고 한다.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고, 지혜와 교묘함을 뽐내는 자들이 오히려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그런데 대의명분과 강상(綱常)을 따르는 것이 ‘바보 같은 짓’으로 치부되는 시대가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이 지혜와 교묘함을 다툴수록 오히려 우(愚)와 졸(拙)이 우리들의 삶을 굳건히 할 수 있음을 부군께서는 250년 전부터 몸소 실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부군(우옹)께서 평생 동안 지키신, “불의에 대해 굴하지 않은 굳은 신념과 절개”를 본받아 국가와 사회, 가정을 위해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도덕관과 인생관을 정립하여 몸소 실천할 뿐만 아니라 부군의 사상(우옹문집)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교육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하겠다.
▶ 이 자료는 경주문중에서 2011년 3월에 발간한 우옹문집을 요약한 것임
▶ 자료수집 및 정리 : 재천(在千)
(끝)
남양주문중 입향조 유사(遺事)와 연혁
입향조 출생 |
* 우량(宇樑)입향조께서는 派始組(鎭南君)의 8世孫으로서 선조(宣祖) 기해(己亥:1599년)년에 출생 하셨다
* 공의 부친은 통훈대부 문화현감 인현(仁賢)이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공의 모친은 흥해최씨(興海崔氏)이며 사원(泗源)의 딸이시다.
입향조 落鄕(潛居) 배경 및 유래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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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
선조 |
o 진남군파 八世祖이신 宇자樑자께서 경기도 통훈대부 양평현감으로 봉직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오랑케들과 맞서 싸우던중 丙子年 12월에 순국하셨다. 八世祖이신 宇자樑자께서 순국한후 인조(仁祖)朝에 宇樑公이 충절로 무공을 세우고 순절강도하였다는 점을 표창하여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성촌일대 약 40만여평을 사패지로 하사받게 되었다 o 八世祖妣 淑夫人 川寧兪氏는 사패지를 받아 어린나이 6세의 九世祖이신 昌자徵자 아들과 함께 南陽州 眞乾으로 낙향하여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남양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o 九世祖이신 昌徵公께서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참봉 벼슬에 오르셨고, 숙종 己巳年 6월8일에 돌아가셨다. o 十世祖이신 松全公께서는 숙종대왕이 장희빈을 정비로 책봉하려하자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방을 도성에 써 붙인 죄로 수감되어 태장으로 돌아가셨다. |
8세조 出生 |
1636년 |
선조 |
8세조 卒 (향년3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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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
인조 |
9세조 出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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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
숙종 |
9세조 卒 (향년6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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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년 |
현종 |
10세조 出生 |
|
1748년 |
영조 |
10세조 卒 (향년84세) |
남양주문중의 연혁 및 주요 행사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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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12월 |
o 진남군파 남양주 문중 구성 및 종친회 규약 제정 종친회원 개인 명의의 재산을 종중 재산 명의로 이전 통합하고 종친회 규약을 제정함으로써 남양주 문중의 제반 활동 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음. |
소종구성 및 규약제정 |
2015년 |
2월 |
o 종친회 규약 개정 종손역(국열), 원로역(청수), 회장역(사흥), 부회장역(광수), 총무역(희면), 재무역(동수), 감사역(두희) 이사회(청수,국열,사흥,광수,동수,희태,희준,경희,희면,희갑,재학) |
신규임원 선정 및 일부 규약개정 |
2005년 |
4월 준공 |
o 1차 崇慕堂(숭모당) 건립 (용정리 산179번지) 선대 八世祖 宇樑(우양)公부터 十八世祖까지 안치 |
崇慕堂 건립 사업 |
2013년 |
3월 준공 |
o 2차 崇慕堂(숭모당) 건립(용정리 산181번지) 선대 十七世祖 부터 2차 崇慕堂(숭모당)에 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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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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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진남군(派始祖), 봉성군(一代祖)) 묘역 참배 매년 한식때 용인 진남군, 봉성군 묘역 참배 |
종친회 주요행사 |
매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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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선대 기제사 시향 시행 매년 음력 10월10일 八世祖부터 十五世祖까지 시향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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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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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종친회 친목 도모 투어 매년 종친간 친목 도모 및 유대 강화를 위한 문화 유적지 탐방 행사 시행 |
자료조사 및 정리 : 국렬(國烈),동수(東秀)
안산문중 입향조 유사(遺事)와 연혁
입향조 출생 |
* 덕수(德修)입향조께서는 파시조의 11세 손으로서 영조(英祖) 갑자(1744년) 4월 22일에 출생
* 공의 부친은 송로(松老)의 장남이시다.
* 공의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 당백의 따님이시다..
입향조 落鄕(정착)期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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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
선조 |
o 입향조의 고조부님이신 통훈대부 문화현감 충의위 인현의 차남이신 가선대부 행 병조참판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우정께서 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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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
숙종 |
o 입향조의 조부이신 통덕량 창형께서 안산으로 이거하셨다가 안산 고잔리에 정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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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67세) |
순조10년 |
o 순조(純祖) 10년 경오년 6월 2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6세 이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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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가정사 |
연 도 |
내 역 |
비 고 |
|
1749년 |
영조25년 |
o 입향조부인인 원주원씨는 필겸(必謙)의 따님으로서 영조(英祖) 기사년(1749) 1월 26일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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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
영조 |
o 입향조와 원주원씨 사이에 2남을 생육 o 장남은 광선이시고 1790.05.22 출생 o 2남은 광록이시고 1796.08.26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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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
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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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문중의 연혁 |
연 도 |
내 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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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12월 |
o 진남군파 종중회가 구성될 때 안산문중도 구성 정익 선조께서 종사에 참여하면서부터 활성화 |
소문종 구성운영 |
1979년 |
8.1 |
o 반월공단 공포되자 보상관계로 규약 제정 |
7장24조로 구성 |
1980년 |
3.5 |
o 용인시 고림동 산22 1,8192m²(분할후 13,837m²) 매입 |
|
1981년 |
2.19 |
o 산22 분할 산 22-5 1983m² |
|
1981년 |
10.2 |
o 산22 분할 산 22-6 1972m² |
|
1981년 |
12.16 |
o 용인시 고림동 산22-6,1972m² 전체에 총 83기의 매장묘지 조성, 이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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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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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안산시 고잔동 산87-3 1200m²에 파시조 5세~13세 11기들 이장 묘지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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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11.2 |
o 파시조 7세손 인현선조묘, 안산시 향토유적 제 11호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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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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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안산 고잔묘 울타리(휀스) 만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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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1.15 |
o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산27-3 105,917m² 매입 o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426-8 임30,795m² 매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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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1.11 |
o 규약 1차 개정, 대의원 수 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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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6.2 |
o 용인시 고림동 131-1 전1,901m² 주차장이용으로 매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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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
o 산22분할 135-2,3,4,5 묘지 각각 100m² 씩 배분 o 납골묘지(총 320위, 80기*4개)조성 |
|
2008년 |
1.27 |
o 규약 2차 개정, 회원자격(5조)제정(24조3항 신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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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
7.29 |
o 인현선조의 인현로, 인현길 등 도로명 주소 명명 |
|
1971년 |
4대 |
o 입향조의 7세손이신 정익선조께서 4대부터 8대까지 |
|
1982년 |
8대 |
10년간 파종회 회장 역임 |
|
1995년 |
12대 |
o 임향조의 6세손이신 택돈선조께서 8대보선부터 12대 까지 파종회 회장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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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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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음력 10월 첫일요일 안산 및 용인에서 시제봉향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산87-3번지 11기 -용인시 처인구 고림동 산22-6번지 04기 |
자료조사 및 정리 : 신순(信淳)
예산문중 입향조의 유사와 연혁
1. 예산문중의 파조(派祖)는 간(侃 : 1574~1631) 선조로서 진남군의 8세손임. 간(侃)선조께서는 병절교위공을 역임하시어, 예산문중을 “교위공 종중”으로 불리기도 함.
2. 간(侃)선조의 4남 찬(撰)선조께서는 파시조 9세손(1611~1667)으로서 벽제읍 성석리에 거주하시다가 충청도 당진(현 송악)으로 이주하셨는 바, 당시 송악은 신창현에 속하는 고을로서 일찍이 파시조 6세손이신 춘림(春林, 1518~1568) 선조께서 신창현감을 역임하실 때에 터전을 잡았던 곳으로 이곳을 연고로 하여 이주하셨음.
3. 이후 파시조 15세손이신 휘종(輝宗, 1828~1909) 선조께서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로 역임하실 때에 생활근거지를 송악인근인 예산(덕산)으로 옮김.
4. 예산문중의 파조(派祖)이신 간(侃)선조의 계보는 파시조 1세 진남군(鎭南君, 1393-1470,壽 78세) → 2세 진례군(進禮君, 1426-1498, 壽73세) → 3세 백성군(栢城君, 1448-1504, 壽57세) → 4세 계원군(桂原君, 1469-1554, 壽86세) → 5세 원경(元卿, 1501-1529, 壽29세) → 6세 춘림(春林, 1518-1568, 壽51세) → 7세 몽량(夢良, 1544-1626, 壽83세) → 8세 간(侃, 1574-1631, 壽58세) 으로 구성
5. 예산문중의 세거지는 예로부터 충남서북쪽에 위치한 해미, 태안, 홍주, 결성, 서산, 면천, 당진, 신창, 덕산, 예산 등 10개 고을을 내포(內浦)라 하여 굴곡진 해안선을 따라 항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新文物이 일찍 들어와 內浦文化를 꽃피운 곳이기도 함.
연산정 양평문중 입향조 유사와 연혁
진남군의 증손 연산정(4세) 및 의경(5세), 신원(6세), 염(7세)선조까지는 경기도 고양에 거주하며 관직을 지내시고 수신제가하였음.
염(7세)선조 때 당파에 휘말려 자손들을 양근현으로 낙향 이후 5대 까지 거주하다가 또다시 당쟁에 연루되어 만천(12세)의 배위 진주 하씨께서 어린 형제 세봉과 후봉(13세)을 데리고 이전하신 곳이 지금 양평종회의 근거지(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가 되었으며 在자 항렬의 10세 선조이심.
진남군의 증손 연산정(4세) 이하 염(7세) 등 선조의 선영은 1980년대 행정구역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에 모두 실존했었으나, 6.25 동란 후 군부대 주둔지 내에 있게 되어 군부대에서 선유리 일대를 징발하여 묘지를 이장하도록 조치했던 바, 부득이 양평종회에서는 화장하게 되었음.
당시 연산정, 염 선조 분묘에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군부대에서 압수하여 유족으로서는 1점의 유품도 소유하지 못하였음.
덕량문중 입향조의 유사와 연혁
파시조(진남군) 6세손 춘림(6세손,1518~1568)선조께서 신창현감(新蒼縣監 : 현 당진 송악)으로 부임하실 적에 부친 따라 파시조 7세손이신 덕량선조께서 낙향하시었으며, 덕량선조가 덕량공 종중의 입향조이시다.
조선시대에는 염전운영권이 종친부에 속한 관계로 파시조 7세손이신 덕량선조께서 종친부의 허락으로 염전운영권을 지정받아 충남 오천군(汚川郡 : 현 당진군) 송악면 갯벌 수 만평에 해당하는 이 지역 일대를 염전으로 개간하여 대대적인 염전사업을 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자손손 살아 왔었음.
그러나 시대의 변화로 예산과 아산 등지로 이주한 친척이 많아지고 그 곳에서 끝까지 고향을 지키신 분은 덕량 입향조의 8대손인 창관(昌觀)선조와 9대손인 성돈(成敦), 10대손인 정시(鼎始)선조이시었음.
송악면 중흥리(복포촌 : 福浦村) 광대동(현 광대골)에 입향조의 묘가 있어 매년 벌초 및 가을 墓祀를 지내왔었음.
그러나 성돈(成敦)선조 때. 돌림병과 일본 경찰의 모략으로 머슴과 일꾼들의 반발과 방화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되자 당진군 당진읍 내 일대(현 거주지)로 이주하게 되었음.
인천구월문중 입향조 유사(遺事)와 연혁
입향조 출생 |
* 입향조 문과 감찰 수(琇)께서는 파시조의 6세손으로서 공의 부친 선직랑 청산현감 양충의 3남중 차남이시다
* 입향조 모친은 숙인 경주김씨 현감 윤조의 따님이시다.
입향조 落鄕(정착)期 |
연 도 |
내 역 |
비 고 |
|
1518년 |
중종 |
o 입향조의 부친이신 선직랑 청산현감 양충께서 부천군으로 낙향 o 입향조 문화감찰 수께서 인천 구월에 정착 |
|
1683년 |
선조 |
o 계미(1583년) 2월9일 돌아가시다 |
인천구월문중의 연혁 |
인천 구월을 거점으로 몇백년 살던 본거지가 시대의 변화와 흐름, 도시개발로 인하여 흩어져 지금은 인천, 부천, 광명, 안양, 수원, 영종도(청라)등 소규모의 문중 구성체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
자료조사 및 정리 : 명선, 대봉
광주문중 입향조의 유사와 연혁
입향조 음직장 우(玗)공께서는 파시조 6세손으로서, 공의 조부는 철산수 효순이며, 공의 부친은 조선 선조때 선직랑 청산현감 양충의 3남이시며, 공의 모친은 숙인 경주김씨 현감 윤조의 따님이시다.
입향조 음직장 우(玗)공의 9세손 한성주부 춘영께서 양주 및 답십리에 이거하셨으며, 춘영의 장남 동은 군수께서 광주군 대왕면 심곡리에 정착하시다.
그러나 1960년대 서울공항개발로 인하여 부산, 성남, 강원 횡성 등지로 생활근거지로 옮기셨고, 선대 묘소는 성남시 심곡동 산16번지에 보존되고 있다.
매년 벌초 때 선대묘소에 모여서 조상을 숭상하며, 친족끼리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자료조사 및 정리 : 창희(昌熙)
행신리문중 입향조의 유사와 연혁
입향조 충의위 인수(仁秀)공께서는 파시조 6세손으로서, 공의 조부는 철산수 효순이며, 공의 부친은 조선 선조 때 정락정 영충의 차남이시며, 공의 모친은 광주이씨 병참판의 따님이시다.
입향조 충의위 인수 공께서는 고양 용두리에 낙향하셨으며, 입향조로부터 인수공의 7대에 이르기까지 서오릉 충의위로 종사하셨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고양, 파주, 서울 등지에 분산되어 살게 되었다.
매년 벌초 때 선대묘소에 모여서 조상을 숭상하며, 친족끼리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자료조사 및 정리 : 병순(炳淳)
오야곡문중 소개
1. 유래 : 오야곡에 사는 전주이씨 진남군파 종중의 종손(봉사손)
-오야곡문중은 경기도 고양시 일상동구 성석동 오야곡을 주요 세거지로 하고, 계원군 이래로 鎭南君祠宇(불천지위)를 모시고 5백년을 살아 온 것에서 유래한다.
-특히 오야곡문중은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파시조의 불천지위를 자자손손 모시고 있는 종손 문중으로서, 鎭南君 → 進禮君(1426-1498) → 栢城君(1446-1504) → 桂原君(1469-1554) → 세자시강원사서 元卿(1501-1529) → 신창현감春林(1518-1568) → 절충장군 夢良(1544-1626) → 남양도호부사 倬(1578-1651) → 참봉 抃(1612-1684) → 부호군 壽喬(1646-1729) → 장사랑 廷蕃(1670-1740) → 통덕랑 德隣(1692-1754) → 秉三(1716-1780) → 益馨(1742-1807)으로 이어지는 진남군의 불천지위를 자자손손 모시는 종손 집안이다
-진남군 사우(불천지위) 및 벽오재
2. 세거지 : 5백 년 동안 이어온 동족촌(집성촌) 오야곡
-계원군(1469-1554) 선조 이후부터 5백년을 고양시 오야곡에 세거하였으며, 연산군 연간(1495-1506) 고양시가 왕명에 따라 금표비를 세우고 거주민을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 고양시에 자리 잡은 그 어떤 성씨보다 오랜 역사를 지녔다.
-진례군 묘소와 백성군 묘소는 당초 고양시 선유리에 있었으나, 1970년 군 탄약고 부지로 묘소가 수용되면서 오야곡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梧野谷 혹은 梧野洞을 한자 뜻대로 보면 오동나무 벌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지명을 뒷받침할 만한 자연 조건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이다. 오히려 오래골로 불린 점과 오야곡 승천원 인근에 옛날 고려장 흔적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고래골’이 변화를 거쳐 한자로 옮겨지면서 오야곡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한편에서는 ‘오얏골’에서 변화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오얏 李씨들의 동족촌인 만큼 일리가 있을 수도 있는 설이다.
-백성군 및 계원군 묘원-고양시문화재
-아무튼 오야곡은 계원군 이래로 전주이씨 진남군파 자손이 동족촌을 이루고 5백년을 지켜왔으나 현재는 10여 가구 만이 현지에 거주하고 있다
3. 구성원 : 병삼-익형의 후손
-덕린(德隣1692-1754))은 병삼(秉三1716-1780)과 병오(秉午) 두분의 자손을 두고 계시며, 병오는 오야곡에서 분리 별도의 ‘병오문중’을 구성하고 병삼의 자손들이 오야곡소문중을 구성한다.
-병삼(秉三1716-1780)- 익형(益馨1742-1807))으로 이어지는 자손들은 매년 8월 마지막 일요일 벌초를 공동으로 하고, 음력 10월 14일 이후 첫 일요일 倬, 抃으로 이어지는 시제를 봉행한다.
-승천원(오야곡 납골묘원)
-위의 사진에서와 같이 2005년 소문중 납골묘(승천원)를 건축하고, 현재 약 50여기를 모시고 있다.
수락문중 입향조의 유사와 연혁
입향조의 출생 |
•작(碏) 입향조(入鄕祖)의 부(父)는 관국(觀國), 조부(祖父)는 수창군, 증조(曾祖)는 황산군이며, 고조(高祖)는 진례군이시다. 입향조께서는 수창군의 첫째 아드님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을 지내신 관국(觀國)과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슬하에 셋째로 태어났다.
•입향조께서는 파시조(派始祖) 진남군(鎭南君)의 6세손(世孫)이시며, 1551년 음력 신해(辛亥) 8월 16일에 출생하셨다.
입향조의 낙향 |
•작(碏) 입향조께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악원(掌樂院) 직장(直長)으로 관직에 계시다가, 좌의정(左議政)을 지내신 숙부 헌국(憲國)이 청주에 관직으로 부임할 때 숙부따라 낙향(落鄕)하셨고 그 후 청주에서 한성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고을 서쪽 송정리(松亭里)에서 일생을 보내셨다.
•숙부(憲國) 충익공(忠翼公)이 편지를 하여 서울로 돌아와 벼슬을 하라고 하였으나 입향조께서는 산수와 풍월에 마음을 두고 편안한 것을 취미로 삼으시며 귀향하지 않으셨다.
입향조의 가족관계 |
•작(碏) 입향조의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선릉 참봉(宣陵叅奉)을 지낸 득중(得中)과 의중(毅中) 두 아들을 두었고
•맏아들 득중(得中) 소생으로 준신(俊臣)·준인(俊仁)·준민(俊民) 세 손자를 두었으며 손자는 모두 충의위(忠義衛)였다.
•증손 윤문(潤文)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 시문(時文)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광문(光文), 기문(起文), 진문(振文), 수문(秀文)은 충의위(忠義衛)였으며,
•고손 우태(宇泰)는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입향조의 주거지 |
•작(碏) 입향조께서는 낙향(落鄕) 당시 청주군 사주면 송정리(현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가 거주지였다.
•1580년(宣祖大王 중엽) 직장공 타계 후 배(配)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세거지를 청원군 옥산면 수락리 모일(慕逸)로(현 청주시 흥덕구) 이주하게 되었고,그 후 아들 득중(得中)과 그 후손들은 이곳에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수락리는 임진왜란 때에 난민이 피난을 와서 덕을 보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해발 271.5미터의 망덕산으로 둘러쌓였고 동쪽으로만 앞이 트여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한 지형이며, 앞으로는 천수천(天水川)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아늑한 지형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수락리(水落里)는 정조 때부터, 모일(慕逸)은 1789년부터 쓰이던 이름이었고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이상면(西江外二上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70년대까지는 전주이씨 진남군파 작(碏) 공 후손들은 수락리의 무중골 치락골 분무골 모일, 장남리 일원에 10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450여 년 동안 살아왔으나 많은 후손들이 출향하여 현재는 40여 세대가 살면서 선대의 묘소 관리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조의 묘역 관리와 시제 |
•작(碏) 입향조께서는 1551년 음력 8월 16일 출생하시어 1580년 2월 8일 돌아가시니 수(壽)가 30이었으며, 묘소는 청주군 사주면 송정리 월명산 산하(山下) 송곡(松谷)에 배(配)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와 합폄(合窆)으로 모셔졌으나,
•청주시 도시계획에 의거 1979년 기미(己未) 3월 27일 옥산면 수락리 산 19번지(모일)로 이장하였다. 작(碏) 입향조의 묘소 아래로 첫째 아들 득중(得中), 그 아래로 3명의 손자분 준신(俊臣), 준인(俊仁), 준민(俊民)의 묘소가 있다.
•모일(慕逸) 묘소 아래에는 득중(得中) 공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묘소를 관리하는 제법 큰 재실이 있었고 수차례 증·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대 변천에 따라 재실 입주자나 관리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1998년 재실을 헐었다.
•그해에 없어진 재실 터에 사당을 건축하여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10일 입향조 작(碏) 공과 아들 득중(得中), 3명의 손자 준신(俊臣), 준인(俊仁), 준민(俊民)의 제향을 모시고 있다.
입향조의 후손 소문종 |
•수락리에는 작(碏) 입향조, 그 후손들의 묘소 관리와 숭조돈종(崇祖敦宗)을 위해 여러 소문중회를 두고 있으며, 그 중 작(碏) 공의 손자 준신(俊臣)의 후손은 전주이씨진남군파 수락소문중(종파), 준인(俊仁)의 후손은 전주이씨진남군파 무중골소문중(중파), 준민(俊民)의 후손들은 전주이씨진남군파 장남소문중(계파)이 있으며, 작(碏) 입향조 후손 모두 즉 종파 중파 계파를 아우르는 대종회(大宗會)를 구성·운영하고 있다.
[자료수집 및 정리 : 진남군파 18대손 장길(長吉)]